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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내 고향도 분홍빛으로 물들었겠지

[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5) 창원 의창동
조각가 김종영 생가 꽃대궐 이원수 작 '고향의 봄'배경
홍난파가 곡 붙이면서 유명 일제 때 실향 서러움 달래
인근 600년 전통 소답시장 창원 대도호부 위용 스며

이일균 기자 iglee@idomin.com 2018년 03월 21일 수요일

"화창한 봄날, 꽃대궐 한번 보러 갑시다!"

며칠 전 그렇게 꽃대궐 나들이를 했다.

꽃대궐에는 어김없이 꽃이 피었다. 앵두꽃, 매화, 동백… 돌담 안 꽃대궐에 사는 이가 말했다. "어디 그뿐인가요? 불두화, 수국에 진달래까지…" 말하는 이의 얼굴도 붉었다.

그곳을 꽃대궐이라 하고, 내가 느닷없이 거기를 찾은 이유는 '순전히' 그 노래 때문이다. 한국인들 머릿속에 '아리랑'만큼 각인된 그 노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도대체 이 동요가 왜 머릿속에서 맴도는지 나는 궁금했다. 칠십, 팔십 넘은 노인들이 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는지 의아했다.

오늘 꽃놀이는 그래서 그 이유를 찾는 여행이 됐다.

앵두꽃·매화·동백까지… 창원시 의창동 김종영 생가가 그야말로 꽃대궐을 이뤘다. /이일균 기자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 진달래와 철쭉이 어우러지고, 마을집 돌담 너머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다."

1926년 11살 소년으로 노랫말을 지은 이원수 선생이 직접 쓴 기록이다. 1911년 양산읍 북정리에서 태어난 그는 이 동네에 생후 10개월에 이사와 9살까지 살았다.

왜 이 노래가 사람들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는지, 인근 고향의봄도서관 내 이원수문학관의 장진화 국장이 설명했다.

"1926년 동시집 <어린이>에 실린 가사에 1929년 홍난파가 지금 곡을 붙였다. 〈조선동요100곡집〉에 담았고, 당시 전국 라디오방송을 탔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다. … 가사를 들으면 한반도 어느 곳이든 연상이 되지 않나?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정한과 맞물리면서 애국가보다 많이 불리게 됐다. 북한에서도 인민가 다음으로 많이 부른다고 한다.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까지 정처 없이 떠돈 동포들 가슴에 한이 되어 맺혔다."

결국, 그 발원이 의창동 꽃대궐이 되는 셈이다.

의창동 꽃대궐은 김씨 고가이며, 조각가 김종영 선생의 생가로 더 잘 알려졌다. 김종영은 이 집 장손으로 1915년 태어나 서울 탑골공원 내 '3·1 독립선언기념탑' 등의 작품을 남겼다. 서구에서 유래한 모더니즘 조각을 한국적인 정서와 감성, 정신성으로 해석한 예술가로 소개된다.

앞에서 "어디 그뿐인가요? 불두화, 수국에 진달래까지 피었다"고 자랑하던 이는 김종영 선생의 후손이다. 그는 "여기서 20~30m 떨어진 '四美樓(사미루)'가 본래 꽃대궐의 일부였고, 구획정리로 지금은 분리돼버렸다"고도 했다. 소답초교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100m 가량 안길로 들어가면 '김종영 생가' 푯말이 바로 나온다.

긴 겨울을 이겨낸 봄나들이가 꽃대궐에서 끝날 수는 없다.

의창동 문화뿌리길 걷기 구간에 이곳 고가가 포함된다. 여기서 창원읍성까지 344m, 또 창원향교까지 252m, 이원수 작가가 6살까지 살았다는 북동샘까지 304m 거리이다. 유유자적 걸으며 봄놀이를 하면 된다.

배가 고플 때쯤 만나게 되는 소답시장.

지금은 동네시장으로 쭈그러들었지만 한때 '창원시장'이었다. 어르신들이 "창원장 간다" "창원장 선다" 할 때 바로 그 장이다. 그만큼 창원을 대표하는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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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답시장 내 약전장은 한때 마산·창원·진해 일대에서 가장 컸다.

2일·7일장이니 오늘도 장이 섰다. 소답시장 안내판 밑에 '600년 전통의 장'이라고 돼 있다.

600년 전통의 장이 괜히 붙은 말이 아니다. 의창동은 예전 창원의 중심이었다. 1408년 조선 태종 때 이곳 의창과 옛 마산인 회원을 합쳐 '창원'이란 지명이 생긴 이래 줄곧 그랬다. 대도호부, 창원향교, 창원읍성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선조 때 전국 몇 안 되는 군사·행정 중심지인 대도호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동쪽으로 김해까지 6.8㎞, 서쪽은 함안까지 10.8㎞, 남쪽은 김해 관하인 웅신(熊神)까지 12.8㎞, 북쪽은 칠원(漆原)까지 9.6㎞를 관할했다. 지금 의창동의 범위도 작은 게 아니다. 소답동과 북동, 중동, 서상동까지 포함한다.

지금 창원장은 많이 위축됐다. 창원·마산·진해 일대에서 가장 컸다는 약전도 10년 전보다 조용하다. 강아지, 고양이, 토끼, 닭은 그때나 지금이나 떼를 이뤄 갇혔다.

10년 전 이 골목에서 만났던 개소주집 아주머니는 여전하실까?

그 가게를 얼핏 지날 때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분일까?

머뭇머뭇대는 내가 창원장을 닮은 것 같다.

2006년 6월 3일 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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